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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플릭스 에서 보는 조선인 여공의 노래 일제 감정기 의 슬픔

모노로그 스튜디오 2025. 4. 6.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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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바다 건너 오사카의 방적공장에서 일해야 했던 조선인 여공 22명의 증언과 차별과 폭력 속에서도 승리했던 그들의 삶의 노래. [25회 전주국제영화제] 1910년대, 일제의 강제 침략으로 조선의 경제는 무너졌고, 10대의 조선 소녀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본으로 돈을 벌러 떠났다. 자의 반 타의반 일본 오사카에 도착한 그들 중엔 11세 소녀들도 있었다. 전세계의 면산업을 주름잡던 일본 오사카의 방적공장에서 일하게 된 조선의 여공들은 일본인 여공들에 비해 열악한 대우와 환경, 그리고 차별과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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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여공의 노래

일제강점기,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바다 건너 오사카의 방적공장에서 일해야 했던 조선인 여공 22명의 증언과 차별과 폭력 속에서도 승리했던 그들의 삶의 노래. [25회 전주국제영화제] 19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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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시대 때부터 대지를 키우는 들판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곳 이 카이 노는 일제강점기 와 해방 제주 4.3 사건을 거치면서 조선인 들의 집단 거주지가 되었다.

인근 쯔루하시 철도 밑에는 재일 교포들이 운영하는 호르몬 야키니쿠가 많다 호르몬 은 오사카 사투리로 쓰레기라는 의미이다 일본 사람들은 내장을 먹지 않고 쓰레기로 버렸기 때문이다.

한때는 버려진 내장인 호르몬처럼 낮은 대우를 받았던 여성들이 있었다.

방적의 조선돼지 이렇게 불리곤 했다...

열두 살 한창 먹고 잠자면서 자라야 할
그 나이에 먹고 살 걱정하면서 머나먼 타지로 떠나 저녁 6시부터 아침 6시까지 일하는 소녀..

너무 힘들어 죽을 거 같으면 사탕을 먹으면서 버텼습니다 그 사탕마저 너무 비싸서 그것마저도 아껴 먹었습니다. 사탕을 먹어도 모르고 실을 끊어먹으면 그날은 몽둥이로 매질을 당하고 한번은 그냥 기억도 없이 잠잔 적 있는데 내 손이 기계에 빨려 들어가서 손이 다 뜯어졌는데 일본인들이 달려와 걱정해 주기는커녕 조니깐 다치는 거야 멍청한 년 이랬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했던 소녀들 그래도 불리는 별명은 조선의 돼지들 입니다...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또 있었습니다. 여공들은 항상 힘들게 일했지만 먹을게 부족했고 병이라도 나면 많이 죽었지만 조선인 여공들은 일본인 여공보다 그렇게 많이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먹는 게 달라서 그랬습니다. 일본인 여공은 단무지나 말린 정어리였는데 조선인 여공들은 일본인들이 거들떠도 안 보는 소 돼지 내장을 얻어와 호르몬도 으로 만들어 먹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붉은 벽돌 담장을 ''빨간벽돌 감옥'' 이라고 비유했습니다.

자유롭게 다닐 수 없도록 여공들을 가둔 벽돌 담장 이였습니다.

 

외출을 하기 위해서는 문지기에게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들으면 대학교 기숙사 랑 뭐가 다르냐 하겠지만
실상 은 달랐습니다.
가끔 볼 일이 있어 외출을 하려고 해도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이 죽어도 믿어주지 않았어요
확실한 이유를 대고 몇 개의 도장을 받아야 지만 밖에 잠시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한국인 들도 경력이 쌓여 일본인 순찰과 된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더욱 한국인들을 괴롭혔습니다. 한국어를 할 줄 알아 불평불만을 하거나 욕설을 하면 득달같이 달려와 개잡듯이 패고 그랬습니다. 일본인 순차로 관들은 한국어를 몰라 그냥 지나치는데 말이죠

 

아마도 자신이 회사에 충성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거겠죠

같은 동족인 조선인 여공들을 매우 심하게 다룬 상애회....

상애회 간부가 여공들을 끌고 와 폭행을 한 곳도 이곳이었다 상애회 지 부장 전대 경은 이쁜 여공들이 있으면 성폭행을 일삼았지만 아무도 반항하지 못했다.

그리고 너무 답답해 미칠거 같은건 배고픔도 맞는 매질도 아닌 공부가 하고 싶었던 소녀들 그이유는 부모님이 타지에서 일하는 소녀들이 걱정되어 매번 편지를 보내주는데 내용은 긴데 정작 일본인 아니면 한국인 관리자들이 읽어주는건 회사에 충성을 다하고 열심히 일해라 이말만 되풀이 해주는 거였습니다.
부모라면 먼 타지에서 일하는 딸들이 미치도록 가여워 그마음을 글에 담지못할정도로 커서 한자한자 정성들여 적었을텐데 그걸 읽지도 못하는 소녀들은 얼마나 애가 타들어 갔을까요

심지어 써서 보내주는 편지도 그리고 편지를 써주는 감독관들도 귀찮아해서 대충 써주는 거 아닌지 편지를 보내면 그 편지 내용에 답이 같아야 하는데 다르기도 했고 너무 답답한 소녀들은 회사에서 야학을 한다 그러면 죽을 정도로 졸려도 야학은 젤 먼저 달려가곤 했습니다.

그리고 결핵이 걸리면 병원에 보내주는 것이 아닌 냄새 나고 더러운 구석에 몰아넣어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쉬는 동안 월급도 들어오지 않는 건 당연했죠 그리고 공장 내부는 목화 먼지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목화를 처리할 때 목화 먼지가 눈처럼 내리고 일이 끝나면 목화 먼지가 온몸을 덮을 정도였으니깐요 폐병에 걸리는 건 당연한 이치였습니다.
병원에 가는 건 자비로 해야 해서 일을 할수록 빚만 늘어나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자 우리 여공들이여 오늘 일과를 말해보자 밤 중에 한밤 중 깊은 잠 들때 잠을 깨우는 시끄러운 소리에 놀라 눈 뜨고

머리 빗으며 세수하고  .....

 

힘든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여공들의 삶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조선 여공분들 다음에는 한국에서 다시 태어나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살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어린 나이에 먼 타지로 떠나 죽도록 졸리거나 아픈 것보다 부모님을 보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더욱 미어집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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